2009년 05월 01일
4월의 제주도를 생각하며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글·사진 김영갑, Human & Books·13,500원
4월의 제주도. 따스한 봄기운 아래 유채꽃이 만발한 제주의 들녘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다. 한편 4월의 제주도는 상상만으로도 슬프다. 1940년대 후반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4.3 민주항쟁과 대량학살, 주민들이 겪었을 역사의 시간 앞에 마주섰을 때 제주는 아픈 기억으로 다가온다. 권력을 위해 희생되었던 생명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은 깊은 상흔이 되어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사회는 줄곧 고개를 숙이게 하는 사건들을 마주해오고 있다. 유신정권시대, 80년의 광주, IMF의 긴 터널과 최근의 용산참사. 하지만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 담긴 김영갑 작가가 남긴 만발한 유채꽃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굴곡 속에서도,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오는 것처럼 그렇게 다시 소생하는 기운으로 우리의 역사는 새롭게 만들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제주도는 아름답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아내와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올레길을 걸었던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리고 또 한 곳. 두모악이 기억에 남는다. 제주의 역동하는 사진을 남기고 간 故 김영갑 작가의 작품과 체취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김영갑 갤러리 - 두모악이다. 사실 두모악에서만 김영갑 작가의 작품과 체취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주의 산과 바다, 나무와 바람, 쾌청한 하늘을 볼 수 있는 어느 곳에서든 김영갑의 작품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80년대 초반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던 중 제주도가 좋아 아예 섬에 정착한 작가 김영갑은 섬 곳곳에 발길을 디디며 제주의 아름다움을 앵글에 담는데 평생을 바쳤다. 밥을 굶어도, 잠자리가 불편해도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감내할 수 있었던 그는 루게릭 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6년간 투병생활을 하던 중 2005년 세상을 떠나 영원히 제주에 머물게 됐다. 투병생활이라고 해서 병원에 누워 6년을 보낸 것은 아니다. 투병기간 중 김영갑은 머지않은 긴 안식의 시간을 바라보며 자신이 작업한 사진들을 위해 폐교를 개조하여 사진 갤러리를 남겼다. 그리고 머지않은 긴 안식의 시간을 바라보며 글을 남겼다. 그 글이 바로 「그 섬에 내가 있었네」이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제주의 모든 생명과 함께 지내며 모든 생명 앞에서 겸허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감히 말하건대 그는 결코 단 한 장의 사진을 건지기 위하여 탐욕적으로 사진 작업을 하지 않았다. 모진 비바람,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시선, 필름을 사기 위해 배를 곯아야 했던 시절. 그는 모든 과정을 받아들이며 이겨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사진은 결국 자연이 주는 선물이었다. 그렇게 그는 모든 생명 앞에서 겸손했다. 모든 생명이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섭리 앞에서 병마와 싸운 자신의 삶마저도 선물로 받아들인 용기 있는 사람 김영갑. 그의 글과 사진에 담긴 삶의 철학은 무엇을 위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고민을 놓치고 살아가는 분주한 일상 앞에 정신을 일깨우는 쉼표가 된다. 그의 글을 곱씹으며 얼룩진 생(生)일지라도 여전히 아름답게 피워갈 희망을 발견한다. 김영갑의 사진과 글을 만나며 4월의 제주도는 그렇게 희망으로 재해석된다.
“여전히 풀과 나무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뽑혀나간 뿌리로 땅을 짚고 새 줄기와 가지를 키워 올립니다.
부러진 줄기와 가지를 추슬러 새순이 움트게 합니다.
끊임없는 비극과 고통 속에서도 풀과 나무들은 비명 한번 내지르지 않고, 불평 한번 없이,
절대로 도망치는 법도 없이 묵묵히 새 삶을 준비합니다.
다가오는 비극과 고통이 그들을 오히려 더 강한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나에게도 비극과 고통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는 것입니다.
이때 들판은 나에게 가르쳐줍니다.
어떻게 하면 시련을 성장의 또 다른 기회로 만들 수 있는지를…."
# by | 2009/05/01 11:34 | Books | 트랙백 | 덧글(0)









